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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쿠아카] 그 계절의 끝 1

부엉이 영물 보쿠토 × 귀신을 보는 아카아시



세상은 표상에 불과하다. 절대적인 실재로써 존재하는게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은 개개인의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인식으로 형성된다. 그리고 그 인식을 가능케 하는 것이 오감이다. 눈, 코, 입.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작동하는 축축한 기관들.


아카아시는 하늘을 본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탁한 감색이다. 스쳐지나가는 정도의 의미를 지닌 단조로운 대화를 듣는다. 바닥에는 지저분하게 갈변한 벚꽃잎이 짓물린 채로 떨어져 있었다. 따뜻한 바람이 풀 비린내를 몰고 왔다. 숨을 들이쉰다. 여름의 뒷모습이 잡힐 것 같았다. 풋내가 날 정도로 푸르러진 나뭇잎이 살랑이고 있다. 아카아시의 표상에서 봄은 어느덧 과거가 되었다.


많은 것이 변했다. 바람이 다 헤집어놓았다. 오늘 같이 두루뭉술한 공기의 흐름이 아닌, 서늘하고 묵직한 바람은 꽃잎이 다 떨어질 때까지 아카아시를 마구 흔들어대다가 결국 영영 날아가 버렸다. 제가 가지고 있었지만, 제 것은 아니었던 것들과 함께. 어쩔 수 없는 일일까? 모든 것은 변한다. 그리고 모든 변화는 반드시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묶인다. 수없이 지고 이기길 반복했던 전쟁처럼. 혹은, 사랑처럼.


아카아시는 손바닥을 폈다. 희끗희끗한 회색 깃털. 원인과 결과가 찐득하게 달라붙은 이 깃털은 상처처럼 손바닥을 가로질러 놓여 있다. 이것이 날아온 곳은 봄이었다. 벚꽃 그림자가 아득하던 봄. 그 봄에 다다르려면 수많은 봄을 거슬러 가야 했다. 봄. 봄. 그리고 봄. 봄으로 되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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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아시는 타자를 치던 손을 들어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눈이 뻑뻑했다. 눈 뿐만 아니라 온 몸이 피로에 짓눌린 기분이었다. 바쁜 것도 바쁜 거지만 몸 자체가 무거웠다. 환경이 바뀌어서 그런가. 아카아시는 몇 주 전 부터 살기 시작한 자취방을 떠올렸다. 벽지는 낡았고 비가 올 때면 온 방에 습기가 들이찼다. 자신만의 공간에 대한 설렘이 옅어질 시점.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4분. 어두운 방 한 켠에 놓여 있는 침대가 간절했다. 슬슬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노트북이 무거웠다. 카페의 입구에는 작은 관상식물이 줄지여 놓여 있었다. 원두 향기에 늘 짓눌려 있는 탓인지 싱싱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 아카아시는 입구를 향하던 걸음을 멈췄다. 볼펜을 챙겼나? 필통을 꺼낸 기억은 없었다. 챙기지 않았더라면 제가 앉아 있던 테이블에 그대로 놓여 있겠지. 하지만 뒤를 돌아볼 생각은 없다. 몇 시간 전 부터 카페 한 구석을 지키고 서 있던 '그것' 이 바로 뒤에 있었다. 몸을 돌리는 순간 눈이 마주칠 것이다. 눈이 달려 있긴 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문을 열기가 무섭게 가라앉은 밤 공기가 볼을 스쳤다. 봄 특유의 달콤한 냄새가 공기를 타고 퍼져나간다. 벚꽃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새카맸다. 이 아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눈감아 주겠다는 것 마냥.


아카아시 케이지는 귀신을 볼 수 있다.


아니다. 아카아시는 귀신이라는 단어에 줄을 죽죽 그었다. 대중매체가 흔히 다루는 선정적일 정도로 노골적인 모습이 귀신의 정의라면, 아까 그것은 기준에 한참 모자랄 게 틀림없었다. 펜은 점점 대담하게 수평으로 뻗어나가 아예 문장 전체를 지워버린다. 볼 수 있다고? 본다는 것이 눈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아카아시는 단 한 번도 그것을 본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어렴풋이 시야 한 구석에서 느껴질 뿐이다. 왜 그런 게 보이는 걸까. 아카아시는 새카맣게 덮힌 문장 아래에 적힌 또 하나의 문장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아카아시 케이지는 기가 약했다. 특별히 자주 아프다거나 가위에 눌린 적은 없었지만, 뻔한 핑계라도 만들어야 제가 보고 있는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문장 다 오래 전에 쓰여진 것이다. 과거의 기억은 조금도 흐릿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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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다. 아카아시는 지금보다 키가 작았고, 부모님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적었으며, 할아버지의 건강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누구도 그렇다고 얘기를 해 준 적은 없었지만 어렴풋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늦은 밤, 거실로부터 불빛과 함께 새어나오는 이야기. 어머니는 오래된 사진을 꺼내 한숨을 푹푹 쉬며 한장씩 두장씩 넘겨보았다. 술을 마시지 않던 아버지는 잔뜩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비틀거리며 귀가하는 일이 잦아졌다. 아이들은 작은 단서에도 민감한 편이다. 할아버지는 약초 냄새를 풍겼다. 아카아시는 코를 알싸하게 후벼파는 그 향기가 좋았다.


집의 분위기가 가라앉을수록 아카아시가 밖에 나가 노는 시간이 늘어났다. 제 존재가 부모님에게 또 다른 신경 쓸 거리를 만들어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아카아시는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이야기를 듣는 걸 더 좋아했다. 주로 산에 관한 이야기였다. 뱀과 토끼와 엉겅퀴와 호랑이.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를 잡아먹고 잡아먹히며 순환하는지. 작은 코로 풀 냄새를 들이마시며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앞치마를 두른 지친 표정의 어머니가 들어왔다. 케이지, 할아버지 쉬게 해 드려야지. 축객령이였다. 아카아시는 그 길로 대문을 열고 놀이터로 향하곤 했다. 어쨌거나 집 앞의 놀이터에는 늘 함께 노는 아이들이 모여들었으니까.


그 날은 유난히 해가 뜨거웠다.


봄이 지나가고 더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은 탓에 모랫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아이들은 운동화 코로 갈라진 부분을 툭툭 건드려 보았다. 누군가가 사막 놀이를 제안했다.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평소의 술래잡기에서 배경만 바꾼 놀이였다. 사막, 초원, 북극, 남극. 날씨의 변화에 따라 놀이터는 옷을 갈아입듯 전혀 다른 곳이 되곤 했다. 가로수는 선인장이 되었고 정글짐은 피라미드가 되었다. 술래는 미라였다. 피라미드에서 막 기어 나온 무시무시한 미라. 아무도 미라 역을 하고 싶지 않아 했다. 네가 하면 안돼? 어제도 내가 술래 했거든, 네가 해.


아카아시는 덤덤히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쟤 시키면 되잖아. 아까부터 말이 없던 아이를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아이는 온통 새카만 느낌이었다. 왜 느낌이었냐 하면,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던 까닭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보려고 해도 도무지 아이에게 집중할 수가 없었다.


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곧 왁자지껄한 웃음이 뒤따랐다. 괜한 장난치지 말라고, 귀신이라도 보는 거냐며 등을 짝 소리나게 때리는 녀석도 있었다. 케이지가 술래하는 걸로! 아이들은 와아 웃으며 달려나갔다. 아카아시는 멀뚱히 서 있었다. 새카만 아이도 땅이 갈라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해가 뜨거웠다. 그림자가 하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던 것 같다. 그 아이를 잡아도 술래가 바뀌지 않을 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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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그 다음 날. 또 다음 날. 마찬가지로 그 아이는 놀이터에 머물렀다. 아니다.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다. '그것'이었다. 미끄럼틀에 올라가 있기도 했고,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있기도 했다. 그것은 매일 서 있는 자리가 달랐지만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는 점, 그리고 절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점은 한결 같았다. 아카아시는 그것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제게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 않는데 괜히 건드릴 이유는 없었다.


문제가 생긴 것은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이사를 갈 거야. 어머니는 앞치마를 탁 소리나게 털며 말했다. 할아버지의 건강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날이 드물었다. 할아버지가 허공을 보고 중얼거리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늘어날수록 어머니와 아버지는 말싸움을 더 자주 벌였다. 끝까지 모시겠다는 거야? 당신 그럴 자신 있어? 그러면 어떡해요. 요양소 같은 곳에서 돌아가시는 걸 볼 순 없잖아요! 아카아시는 두 사람이 입에 올리지 않는 주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이야기를 들었던 게 아주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다.


내일 밤에 떠난다고 했다. 어머니는 밤에 떠난다는 사실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죄 진 것도 아니고. 어머니가 전화에 대고 불평을 하는 것을 들어서 알 수 있었다. 내일은 굉장히 바쁜 날이 될 것이고, 아카아시까지 짐을 꾸리는 것을 도와야 할 터였다. 오늘이 놀이터에 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인 셈이다. 아카아시는 뒷꿈치를 운동화에 쑤셔넣으며 대문을 나섰다.



'나 내일 이사 가. 오늘이 마지막이야.'



한참을 놀다 해가 기울어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갈 즈음, 아카아시는 덤덤하게 이사 사실을 알렸다.눈물을 글썽이는 아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눈만 껌뻑이고 서 있었다. 한 아이가 늘 자랑하던 유리 구슬을 제 손에 쥐어주었다. 평소에 특별히 친하게 지낸 것도 아니었는데. 고마워. 구슬을 제 주머니에 넣었다. 아이의 그렁거리는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그 아이의 뒤에 그것이 서 있었다.


아카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보이진 않았지만 어쩐지 알 수 있었다. 태양은 뜨거웠고, 대기는 달아올라 셀로판지처럼 어른거리고 있었다. 돌아갈 시간이다.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고 막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그것이 움직였다.


걸음을 옮기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냥, 휙 하고 다가왔다. 거리가 좁혀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카아시는 그것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눈을 떼는 순간 제게 달려들 것 같았다. 불안했다. 그것이 손을 뻗었다. 눈을 깜빡일 수 조차 없었다. 손끝이 향한 곳은 제가 아니라 다른 아이였다. 구슬을 준 아이였다. 그것이 그 아이의 팔을 휘감는 것 까지 본 아카아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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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은 잠이 오질 않았다. 새마저 잠든 시간에 몰래 할아버지의 방문을 열었다. 병마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약초와 섞여 문틈으로 새어나왔다. 할아버지는 미동 없이 잠들어 있었다. 숨을 거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요했다. 콜록, 콜록...... 할아버지는 마른 기침을 뱉으며 뒤척였다. 그제서야 아카아시는 문을 닫고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Twitter @DR34MY3Y3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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