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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쿠아카] 변하지 않는 것

인정하기




우리는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흘러가고 있죠.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분명히 있어요. 주위를 둘러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친구들― 


삑.


티비를 껐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끊기자 방의 공기가 무거운 적막 속으로 가라앉았다. 시곗 바늘은 막 두 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저런 방송을 왜 이 시간에 내보내는 걸까. 아카아시는 한숨을 여과없이 뱉어냈다. 잠이 오질 않았다. 근처에 던져둔 휴대폰에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고, 날이 흐린 탓인지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요상한 붉은빛을 띄고 있었다. 우유라도 데워마실까 싶어 몸을 일으키던 순간이었다. 도어락이 풀리는 소리가 들린 것은.


"늦으셨네요."


차갑게 가라앉은 새벽 공기가 현관을 꽉 채웠다. 보쿠토는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가누며 신발을 벗고 있었다. 집 안으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술냄새가 확 풍겨왔다. 보쿠토는 고개를 들어 아카아시를 쳐다보았다. 이미 풀릴대로 풀린 눈은 제 얼굴을 제대로 담아내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어어."


혀가 잔뜩 꼬인 보쿠토의 대답이었다. 침실로 몸을 질질 끌고 가는 것을 무미건조하게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아무렇게나 풀어 던진 넥타이가 등 뒤로 떨어졌다. 침실 문이 쾅 소리나게 닫혔다. 아카아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부엌으로 가 머그잔에 우유를 부었다. 식탁에 차려놓은 다 식어빠진 저녁 식사는 버려진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전자렌지의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2분 30초. 아카아시는 손도 대지 않은 음식들을 쓰레기봉투에 밀어넣었다.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스스로가 화가 났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쓰레기봉투의 가장 밑바닥에는 오래 전에 버렸던 것이 모양 없이 썩고 있었다.


따끈한 머그잔을 들고 소파에 앉기 직전,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굳게 닫은 침실을 바라보았다. 순간 문이 불길에 휩쌓여 무섭게 타오르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열기가 눈시울을 덥혔다. 눈을 깜빡였다. 문을 감싼 화염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익숙한 새벽이었다.



/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우중충한 날씨를 핑계 삼아 늦잠을 자고 말았다. 좁은 소파에 몸을 구겨넣은 탓에 온 관절이 삐그덕거렸다. 뻐근한 허리를 일으키자 얇은 담요가 팔을 타고 흘러내렸다. 제가 덮은 기억은 없으니 아마 보쿠토가 덮어준 것이리라. 대충 개켜서 소파의 팔걸이에 놓아둔 뒤 휴대폰을 확인했다. 오후에 밥이나 한 끼 하자는 츠키시마의 문자였다. 눈을 비비며 부엌으로 향했다. 커피라도 한 잔 내려 마시기 위함이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보쿠토는 아침 일찍 나간 모양이었다. 하품을 하며 찔끔 삐져나온 눈물을 훔쳐냈다. 어설프게 차려진 아침 식사는 온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토스트 두 조각과 달걀. 베이컨. 그리고 차갑게 식은 커피. 접시 옆에는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일이 있어서 일찍 나간다. 밥 꼭 챙겨 먹어.]


꾹꾹 눌러쓴 글씨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침대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시트 끝 부분이 살짝 주름져 있는 게 과연 보쿠토 씨 다웠다. 시트를 탁 소리나게 폈다. 아카아시는 현관으로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았다. 눈이 조금 부었지만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몸을 돌려 현관 문고리를 잡았다. 텅 빈 배가 오히려 가벼웠다. 식은 커피는 제 발목을 잡을 수 없었다. 아무런 향기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



'요즘 보쿠토 씨랑은 어때요?'


츠키시마는 제 앞에 놓인 쇼트케이크를 포크로 잘라내며 그렇게 물었다. 깨작거리는 습관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시간이 애매하게 잡힌 탓에 차를 마시는 것으로 계획을 바꾼 참이었다. 아카아시는 모락모락 김을 피워내는 아메리카노를 내려다보았다. 카페 안은 주말 오후임에도 한산했다. 잔잔한 뉴에이지가 귀를 간지럽혔다.


무심함을 가장한 걱정이었다. 질문을 던진 츠키시마는 대수롭지 않게 케이크를 오물거리고 있지만, 아마 둘 사이의 분위기를 눈치채고 한 말일 터였다. 쿠로오로부터 무슨 말을 들었겠지. 보쿠토와 쿠로오는 여전히 친한 사이였다. 아카아시가 츠키시마와 종종 약속을 잡는 것 처럼, 두 사람도 시간이 날 때 마다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고민할 것도 없었다. 안경 너머로 맞춰오는 눈을 슬며시 피하며 아카아시는 대강 얼버무렸더랬다. 잘 지내지. 츠키시마는? 쿠로오 씨가 잘 대해줘?


그렇게 시덥잖은 대화를 하다가 저녁 약속이 있다는 츠키시마를 보낸 게 벌써 한 시간 전의 일이었다. 함께 있을 때도 말이 많이 오가는 편이 아니었던 탓에 공기를 감싼 침묵은 충분히 익숙했다. 편안하기까지 했다. 카페 안의 사람들은 아까보다 더 줄어 있었다. 나른한 오후였다. 아카아시는 테이블 옆 책장에 꽂힌 책을 한 권 집어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분명히 있다. 주위를 둘러보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친구들......이들이야말로 시대의 흐름과 관계가 없는, 불변하는 소중한 가치인 것이다.


느껴지는 기시감에 눈을 찡그리며 책 표지를 들췄다. 익숙한 남자의 얼굴이 떡하니 박혀있었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어제 티비에 나와서 비슷한 말을 떠들던 사람이었다. 띠지에 베스트셀러라는 글씨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별 게 다 베스트셀러네.'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사람들은 믿고 싶어한다.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자신을 기다려 줄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납득하길 원한다. 사실 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그렇다고 말해줄 사람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안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헛소리가 괜히 잘 팔리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며, 아카아시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언제부터인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제부터 날이 영 우중충하다 했더니, 그 웃기지도 않은 방송 대신 일기예보나 제대로 챙겨볼 걸. 무심코 시선이 닿은 맞은편 횡단보도에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우산을 비뚤게 쓰는 것은 보쿠토의 습관이었다. 공들여 세운 머리가 젖는 것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걸까. 휴대폰을 귀에 댄 채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아카아시는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장에는 같은 책이 다섯 권이나 꽂혀 있었다. 발꿈치를 세워 손이 잘 닿지 않는 맨 윗칸 구석에 제가 읽던 것을 꽂아넣었다. 슬슬 돌아갈 시간이었다.



/



예상대로 집은 텅 비어있었다. 아카아시는 흠뻑 젖은 옷을 갈아입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소파에 주저앉았다. 빗줄기가 점점 더 거세지더니 제가 집에 도착할 즈음엔 아예 쏟아붓기 시작했다. 우습기 그지없었다. 불을 켜지 않은 탓인지 집 전체가 빗물에 잠겨버린 것 같았다. 축축한 물비린내가 공기를 가득 채웠다. 공기 뿐만 아니라 자신의 뇌에도 가득 차 있었다. 아까의 미소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언제가 마지막이었던가, 그가 제 곁에서 그런 미소를 지었던 게.


아카아시는 변치 않는 것을 믿지 않았다. 변치 않는 애정, 영원한 사랑.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모든 관계에는 유효기간이 있었다. 접시 위의 토스트가 너무 딱딱해져서 먹지 못하게 되어 버린 것 처럼, 자신과 보쿠토의 관계 역시 누릴 수 있는 시간을 넘겨 버렸다. 유효기간이 한참 전에 지나 있었다.



왜 전에는 눈치채지 못했을까.



눈치채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겨냥한 물음을 던졌다. 아니다, 알고 있었다. 단지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다. 아카아시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저를 둘러싼 삼면에서 낯선 냄새가 났다. 가구마저 낯설었다. 낯선 티비, 낯선 식탁, 낯선 소파. 제가 이 곳에서 지냈던 게 꿈 속에서 일어났던 일 같았다. 행복한 시간이 끝났고, 이젠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용기가 제게는 부족했다.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지 않으면 쭉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눈을 감았다. 인정해야 했다. 우리는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판단하기 힘들 정도의― 사랑하는 사람들―  남자의 목소리가 어디에선가 울리고 있었다. 도어락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발걸음이 익숙한 박자로 다가왔다. 아카아시는 입을 열었다.






Twitter @DR34MY3Y3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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