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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쿠아카] 5월

잃어버린 것





나뭇잎 몇 장이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벚꽃의 설렘이 지난 자리에는 철쭉의 단내만이 남아 살갗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아, 5월이구나. 싸구려 암술과 수술들이 고개를 쳐들고 햇빛을 만끽하는 봄의 과도기. 이 계절은 지긋지긋하게 길었다. 아카아시는 손을 들어 얼굴에 드리우는 햇빛을 가렸다.


더워.


어줍잖게 데워진 공기 탓에 목이 말랐다.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한 블록만 더 가면 자판기가 있었고, 마침 동전 지갑엔 딱 이온음료를 하나 뽑아 마실 정도의 잔돈이 들어있었다. 아카아시는 익숙한 무게감을 찾아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아? 까슬까슬한 천 대신 뭉쳐있던 먼지가 손에 묻어나왔다. 반대쪽 주머니를 뒤졌다. 바스락거리는 흑사탕 껍데기가 잡혔다. 하나를 까서 알맹이를 입에 넣은 뒤 마땅히 버릴 곳이 없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것이다.


잃어버렸나. 바람이 가슴을 베고 지나갔다. 아카아시는 손바닥에 놓인 사탕 껍질을 내려다보았다.



/



그 날도 나무 그림자가 빽빽했더랬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늘었고, 늘 다니던 길이 평소보다 꽉 차 있었다. 아카아시는 새삼 실감했다. 드디어 봄이 왔구나. 그러나 여전히 특별할 게 없는 일상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선배와 함께 근처 편의점에서 허기를 채우고 돌아가는 길이었으니까.


"그래서 말이야, 너랑 헤어지고 반에 딱 들어갔는데, 문학 교과서가 없어진거야. 그런데......"


또 그 교과서 이야기. 벌써 오늘만 해도 두 번째. 본인은 자각하지도 못하겠지. 선배는 시시콜콜한 일상을 제게 보고하는 것을 좋아했다. 아카아시랑 있으면, 뭐랄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달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던 말에 자신은 뭐라고 대답했던가. 그런가요? 저도 좋아해요. 꿈이라면 모를까. 다른 사람 앞에서도 말 많이 하시잖아요. .....그래, 이렇게 받아쳤던 것 같다. 언젠가의 대화를 떠올리며, 아카아시는 익숙하게 장단을 맞춰주고 있었다.


"......겨우 살았다니까! 코노하 그 자식, 말도 없이 남의 교과서를 들고가면 어쩌자는 건지."

"그런가요, 보쿠토 씨."

"아카아시도 조심해야 해!"


저는 2학년인데요. 덤덤하게 응수한 아카아시는 걸음을 옮겼다. 해가 길어졌다. 건물의 유리창이 노을을 반사해 반짝거렸다. 그런 이야기가 있었지. 가난한 아이는 항상 창문을 통해 금으로 만들어진 집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막상 찾아가보니 단지 창문에 햇빛이 반사된 것에 불과했다는 이야기. 그러나 실망감에 고개를 돌렸을 때, 아이가 본 것은 자신의 집이 찬란한 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광경이었다.


'요컨대 행복은 바로 당신 곁에 있습니다, 라는 건가.'


뻔하지만 맞는 이야기다. 자신의 행복은 가까이에 있었으니까. 그러나 손이 닿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행복. 그 자체만으로도 찬란한 단어. 집으로 돌아간 아이가 제 곁의 금빛을 잡아챌 수 있었던가? 아카아시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보쿠토가 따라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거리가 꽤 많이 벌어진 뒤였다.


"안 오고 뭐하세요."


또 뭣 때문에 저러는 걸까. 아카아시는 꼼짝없이 왔던 거리를 되돌아갔다. 이거 좀 봐봐, 아카아시. 보쿠토는 길가에 펼쳐진 가판대에 코를 박고 있었다. 한숨을 푹 쉬며 가까이 다가갔다. 여대생 두 명이 생글생글 웃으며 서 있었다. 뭔가 했더니. 보쿠토의 시선을 잡아 끈 것은 지극히 평범한 동전 지갑이었다. 여름의 하늘을 닮은 파란색. 평범하다 못해 싸구려로 보일 지경인데, 이것 때문에 따라오지도 않고 이러고 있었던 거야? 제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배는 이제 눈까지 반짝이며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번에 아카아시가 내 가방 바닥에서 동전 엄청 찾아냈잖아? 그거 보고 아무렇게나 던져 넣지 말라고 했었고."

"그랬었죠."

"이거 어때?"

"사고 싶으면 사시던가요."

"아카아시는 안 살거야?"

"저는 저런 거 없어도 동전 제대로 챙겨 다니거든요."


안 오시면 먼저 갑니다. 단호한 제 말투에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눈만 껌뻑이고 있는 보쿠토를 두고 아카아시는 걸음을 옮겼다. 필요하다면 더 제대로 된 가게에서 오래 쓸 수 있는 것을 살 것이지, 부족한 것도 없는 사람이. 보쿠토가 같이 가자며 빠른 걸음으로 뒤따라왔다.


"안 사시려고요?"

"같이 사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걸!"


미묘하게 풀죽은 얼굴이었다. 어떻게 달래야 하나 싶어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니 뒷머리를 긁적이며 하는 말이 있었다.


"아카아시랑 나는 항상 같이 다니기도 하고, 주장이랑 부주장이기도 하고.....뭔가 이거다―싶은 걸 맞추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동전 지갑이면 실용적이고. 매점 갈 때라던지, 자주 쓰니까. 그렇게 말하는 동안 보쿠토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아카아시의 걸음도 따라 느려졌다. 그리고 멈추었다. 보쿠토가 씩 웃으며 말했다.


"뭐, 동전 지갑이 싫으면 다음에 다른 걸로 사자!"


스스로 기운을 차린 모양이었다. 오렌지빛 하늘을 등지고 기울어진 미소가 눈이 부셨다. 저도 모르게 숨이 멈췄다. 행복이었다. 닿고 싶었다. 허상이라는 걸 깨닫는 날이 온다 해도 상관없었다. 아카아시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며 뒤돌아섰다. 보쿠토 상, 동전 지갑 필요하니까요.



/



이제 지갑은 빛이 바랠대로 바래 축축한 하늘색이 되었다. 꾸준히 들고 다닌 탓인지, 아니면 단지 천이 싸구려인 탓인지. 제작년의 졸업식이 떠올랐다. 선배는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었다. 나 없이도 넌 잘 할 거야. 주머니에 묵직하게 들어있는 동전 지갑에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더랬다. 짭짤한 타액을 넘겨 삼키며, 그리고 끝내 하지 못할 말을 넘겨 삼키며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면 울컥하고 쏟아질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선배의 빈자리는 컸다. 마음 한 구석이 뻥 뜷린 것 같았다. 바쁜 건지, 저를 잊은 건지. 졸업한 뒤에도 매일 찾아오겠다는 호언장담과는 다르게 선배는 좀처럼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그럴수록 자신은 동전 지갑을 더 악착같이 챙길 수 밖에 없었다. 그게 선배라도 되는 마냥. 잔돈이 얼마 들어있지 않은 날에도, 지각을 할 뻔한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선배도 여전히 들고 다닐까. 아니, 가지고 있긴 할까. 이러다가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도 했다. 소중한 물건을 지니고 다니는 이들이 흔히 그렇듯, 주머니 속의 무게가 문득 두렵게 느껴지는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갑을 챙기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매번 바지 주머니 속에 오른손과 함께 찔러넣었다.


그리고 여러 날이 지났다.


여러 계절이 지났다. 다시 한번 봄이 왔고, 다시 한번 겨울이 갔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아카아시는 생각을 덜 하게 되었다. 지갑의 색이 바랠수록 그것이 지니고 있는 의미 또한 점점 퇴색되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새파란 하늘색을 볼 때 마다 떠올리던 뒷모습은 이제 많이 희미해져 있었다. 지갑을 챙기는 것은, 그래, 말하자면 습관 같은 것이 되었다. 더 이상 토스를 올릴 일이 없음에도 무심코 제 손끝을 주무르는 것 처럼, 그것이 그저 그곳에 있기 때문에, 익숙하기 때문에 하게 되는 일. 단순한 매커니즘.


그랬는데.
늘 제대로 챙겼는데.


도대체 어디에 두고 온 거지.


아카아시는 이미 구깃구깃한 사탕 껍질을 힘껏 쥐었다. 길 한복판에 멈춰 서 있는 탓에 어깨와 팔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부딪혔다. 편의점에서 사탕을 샀을 때 마지막으로 동전 지갑을 꺼냈었다. 그렇다면 그 지갑은 주머니에 스스로의 무게감 대신 가볍고 바스락거리는 사탕 껍질을 남기고 사라진 셈이다. 졸업한 이후로는 잘 가지 않던 편의점을 들렀던 게 화근이었을까. 하필이면 옆의 서점에 볼 일이 있었다. 선배가 그 편의점의 만두를 좋아했었지. 주먹밥이나 라면 등으로 배를 채운 뒤에도 반드시 하나를 사 먹곤 했었다. 연이은 사양에도 불구하고 매번 반을 쪼개 한쪽을 제게 건네던 손이 아른거렸다. 제 입에는 향신료가 너무 강했지만, 손을 덥히던 폭신한 열기는 따뜻했더랬다. 잠시 계절 다른 추억에 빠져 있자니 손끝에 두루뭉술한 바람이 부딪혀왔다. 계산한 뒤에 분명히 챙겼던 것 같은데.


아니면 학교에 두고 왔나. 가방을 정리하던 중에 강의실 책상에 꺼내놓은 채 다시 챙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누군가가 남겨둔 말도 안 되는 낙서 위에 몸을 눕힌 채로, 제가 가져가주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혹은 길거리에 떨어뜨렸거나. 동전이 얼마 들어있지 않은 보잘것 없는 무게라 주머니에서 흘러나오는 걸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찾으러 가야 할까.


편의점까지는 꽤 거리가 되었다.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하나하나 길을 되짚어가며 찾기엔 덥고 목이 말랐다. 차비만 따지고 보자면 잃어버린 돈보다 훨씬 많이 들게 뻔했다. 지갑 자체도 별로 비싼 게 아니었고, 애써 돌아가서 찾아본다고 해도 여전히 그곳에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럼에도 아카아시는 쉽사리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단내를 머금은 바람이 다시 한번 불었다. 상실은 더 차갑게 닿아왔다. 아카아시는 차라리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묻고 싶었다. 저기요, 제 동전 지갑 못 보셨나요. 떨어뜨린 것 같은데 어디서 떨어뜨린건지, 도대체 어디다가 두고 온 건지 알 수가 없네요. 정말로 많은 날이 지났어요. 이제는 그 지갑이 제게 있어 소중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조차 구별할 수 없게 되어버렸는데...... 차라리 잃어버린 것을 알아채지 못했더라면. 어쩌면 이 상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예정되었을 것이다.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주 조금 옅어지던 바로 그 순간. 아이가 창문을 내다보지 않게 된, 어느 알 수 없는 평범한 날에서부터.


아카아시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줄곧 향하던 방향이었다.




Twitter @DR34MY3Y3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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